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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기/명부

팔라빈 라일락

팔라빈 라일락은 처음부터 막 애정이 가던 식물은 아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관엽파라 꽃나무에는 큰 감흥이 없다. 그럼 나는 어쩌다 팔라빈 라일락을 들이게 된 것일까.
팔라빈 라일락의 이름은 메리. 이 이름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늘 꽃집을 기웃대던 중,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유칼립투스가 있었다.
그 유칼립투스가 7000원이었다. 잔돈을 거슬러 받기 귀찮아서 그 옆에 있던 3000원짜리 포트를 함께 집었는데, 그게 팔라빈 라일락이었다.
당시 한참 반지의 제왕 리마스터링 개봉을 기념해 씨앗본 책을 정주행하고 있었는데, 나무들을 들였으니 나무와 친한 호빗 콤비의 이름을 따다 붙였다. 피핀과 메리.
그렇게 피핀이 사망하고...(사망 사유: 과습) 내게는 메리만 남은 것이다.

2021년 4월쯤, 꽃이 막 펴질락 말락한 상태의 메리(왼쪽)를 데려왔다. 이때만 해도 피핀(오른쪽)이 참 예뻤는데...

이때 메리는 내게 덤 같은 녀석이었다. 게다가 이 녀석이 벌레 청정 구역이던 우리집에 뿌리파리를 끌고 들어왔다!
봄 밤, 흙을 관찰하다가 포르르 날아오르는&흙으로 기어드는 뿌리파리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겁했던지!
이때 나는 처음으로 농약을 사봤다. 빅카드... 졸지에 온 집의 화분이 빅카드 샤워를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라일락이 만개하자 향이 정말 좋았다...라고 쓰면 좋겠지만, 사실 생화의 향은 약간 꼬리꼬리한 감이 있다. 그래도 팡팡 터지는 꽃잎을 보는 재미가 있긴 했다.
봄에 꽃이 피는 식물들이 그렇듯이 꽃이 지고 나자 메리는 그냥 잎나무가 되었다.

잎나무 메리. 초록초록 싱그럽다.

이때까지도 나는 팔라빈 라일락에 큰 애정을 갖진 않고 있었다. 그냥 있으니 키우고 안 죽으니 예쁘다 정도.
그리고 겨울이 왔다.

대머리가 된 메리.

월동하는 나무는 처음 키워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고불변의 진리, 걱정시키는 녀석에게 한 번이라도 더 손이 가고 눈이 가고 애정이 간다.
꽃나무는 겨울을 춥게 나야 이듬해 꽃이 맺힌다고 해서, 대머리 상태의 라일락을 부랴부랴 창문 쪽에 바짝 붙여 내놓았다.
잎이 하나도 없으니 물도 잘 안 말라서 겨울 동안 거의 한 달~한 달 반 간격으로 물을 줬던 것 같다.
그렇게 도무지 이게 죽은 건지 산 건지 분간도 안 되는 상태로 3개월을 보냈다.
혹시 죽었나 싶어서 가지를 가볍게 당겨보고, 안 뽑히면 안도하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라일락의 옆구리에서 처음 연둣빛이 감도는 것을 봤을 때의 감격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게 월동하는 나무를 키우는 기분이구나ㅠㅠ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서야 살아있다고 고개 내미는 걸 최초로 목격하는 감격이 이런 거구나. 황량한 겨울을 한 조각 떼어다 기르는 기분은 이렇구나.

이렇게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낸 라일락은 쑥쑥 잎을 키워서 지금은 이렇게 되었다.


처음 데려왔을 때보다 꽃눈이 엄청나게 올라와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5월쯤 되면 꽃이 활짝 피어줄 텐데, 작년에 꽃을 기다리던 마음과는 사뭇 다른 기대감과 기쁨으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한 해 한 해 겨울을 날 때마다 애정이 두텁게 쌓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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