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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빈 라일락 팔라빈 라일락은 처음부터 막 애정이 가던 식물은 아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관엽파라 꽃나무에는 큰 감흥이 없다. 그럼 나는 어쩌다 팔라빈 라일락을 들이게 된 것일까. 팔라빈 라일락의 이름은 메리. 이 이름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늘 꽃집을 기웃대던 중,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유칼립투스가 있었다. 그 유칼립투스가 7000원이었다. 잔돈을 거슬러 받기 귀찮아서 그 옆에 있던 3000원짜리 포트를 함께 집었는데, 그게 팔라빈 라일락이었다. 당시 한참 반지의 제왕 리마스터링 개봉을 기념해 씨앗본 책을 정주행하고 있었는데, 나무들을 들였으니 나무와 친한 호빗 콤비의 이름을 따다 붙였다. 피핀과 메리. 그렇게 피핀이 사망하고...(사망 사유: 과습) 내게는 메리만 남은 것이다. 이때..
벨벳 싱고니움 테이블야자 그대로와 벨벳 싱고니움 사이에는 초록 다리를 건넌 녀석들이 몇몇 있다. (유칼립투스야... 관음죽아...) 그러나 식물 명부의 세계는 잔혹한 법... 언제나 쓰는 시점 기준으로 살아있는 녀석들의 기록만 남길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는 벨벳 싱고니움, 이하 벨싱이다. 지금 벨싱이는 시무룩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다. 봄 버프는 벨싱이에게도 유효했다! 벨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새로 나는 잎은 보들보들하고 촉촉한 촉감으로 만지는 재미가 있다. 키워본 경험상 물도 좋아하고 바람도 좋아하고 해도 좋아하고(직광x)... 주는 대로 다 적응해주는 순둥이다. 지난 가을 풍성하게 잘 자라주었던 벨싱이의 머리를 싹둑싹둑 잘라 삽수로 만들면서, 벨싱이는 겨우내 못난이 상태로 지냈다. 삽수 하나는 친구에게, 삽수 ..
테이블야자 1번이 스파티필름이라면 2번은 무조건 테이블야자다. 이 녀석은 스파티필름 츄우기를 사온 바로 다음 날 데려왔다. 영원히 2번일 녀석... 하지만 미모면에서는 츄우기를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이 쭉쭉 힘있게 뻗은 잎을 좀 보라지! 이 녀석이 처음부터 이렇게 예뻤던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 테이블야자를 사온 뒤 2년이 흐르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나는 '그대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대로... 뭐 거의 저주가 아닌가? 싶지만 그때도 나름대로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대로가 갑자기 미친듯이 잎을 내기 시작한 것은 작년의 일이다. 아니, 그 전에도 슬슬 성장할 기미가 보이기는 했는데, 작년 여름 이 녀석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이전의 왜소했던 모습을 찍어놓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아마 이 집에 ..
스파티필름 식물이 점점 늘면서, 얘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나 기록을 해두고 싶어서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백만년만에 티스토리에 들어왔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식물 명부를 작성할 때 1번이 스파티필름이 아니면 몹시 섭섭한 일일 것이다. 우리집 스파티필름의 이름은 '츄우기'. 나는 이 녀석과 이사를 두 번이나 했다. 햇수로는 올해로 5년째. 물을 안 주면 사정없이 늘어지며 시위를 하는 게 귀여워 저렇게 이름을 지어줬었다. 5년된 스파티필름이 뭐 이렇게 작아요? 예, 그것이... 제가 재작년 직광에 홀랑 태워먹는 바람에... 원래는 놀러온 엄마가 질투할 정도로 풍성하고 예뻤는데, 홀랑 탄 이후로 영 수세가 회복이 안 된다. 잎도 잘아졌다. 그래도 최근엔 새끼를 좀 냈길래 분리시켜주었다. 그냥 두고 좀..
2021년 3월 10일: 『그림자로부터의 탈출』, 야누쉬 자이델 야누쉬 자이델의 『그림자로부터의 탈출』 프롤로그에 춥고 냄새나고 로켓 발사 소음이 굉장한 벙커와 탈출을 꿈꾸는 소년 죄수가 등장했을 때, 나는 숨죽이며 다음 이야기의 향방을 예측했다. 아마도 소년은 숱한 고비를 넘기며 탈출에 성공할 것이다. 아니면 탈출에 실패할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다면 뭔가 중요한 것을 잃을 것이고, 탈출에 실패한다면 뭔가 중요한 단서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1장에서 갑자기 배경이 바뀌고 톰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소년이 주동인물으로 등장했을 때도 나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후반부에서 두 소년의 세계가 교차하면서 만나게 될 것이므로. 나의 자신만만한 예측은 빗나갔다. 빗나갔기 때문에 서두에 쓴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폴란드와 소비에트 연방 간의 관계를 잘 모르는 채로 이 소..
2020-01-16: 잠으로 돌아가기 2020-01-16(목) 잠으로 돌아가기 달걀과 닭의 싸움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윤목은 잠이 먼저였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태초에 말이다. 다들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잠에 빠져 있었을 거라고. 그러다가, 누군가 불가피한 이유로 불현듯 눈을 뜨고 움직이게 되었을 거라고. 그래서 분열이 일어나고, 손발이 따라붙고, 털이 빠지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생겨났을 거라고. 지현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현이 그리는 태초의 모습은 윤목과는 많이 다르니까. 성스러운 빛을 등에 진 창조주가 입김을 불어넣자 최초의 날숨을 몰아쉬고 속눈썹을 팔락이며 말랑한 발로 대지를 밟는, 발가벗은 인간이 거기 ‘있었노라’. 지현은 늘 자신이 그렇게 독실한 사람은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윤목은 ..
2020-01-15: 말리의 육십 번째 생일 2020-01-15(수) 말리의 육십 번째 생일 내가 보냈던 생일 중 최고의 날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어요. 아버진 큰 고무보트를 빌려서 강-무슨 강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바다였을까요? 호수였을까요? 하도 오래 전이라. 다만 아버지가 바지를 푹 적신 채 날 그 위에 태워 물 가운데로 밀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베이지색의 면바지가 온통 젖어 흙색이 되어 있었고요. 난 그 고무보트에 혼자 누워 있었죠. 큰 챙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요. 아마 언니의 것을 물려받았을 거예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은 많았는데…….글쎄, 여섯 살이 많았나? 하도 오래 전이라. 해는 챙과 구름으로 반쯤 덮였지만 여전히 뜨거워서 눈을 뜨기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설치해 준 낚싯대를 옆에 두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미리 보트 밑..
2020-01-14: 사인, 코사인, 그리고 탄젠트 2020-01-14(화) 사인, 코사인, 그리고 탄젠트 사인과 코사인은 뱃머리에 서 있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쌍둥이로 태어난 두 사람은 조선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자연스럽게 일을 배웠다. 무난한 유년시절이었다. 열다섯이 되던 해, 뛰쳐나와 배에 몰래 오르지만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지금도 고향에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소 일을 거들거나 어머니를 따라 회계를 배워 밥을 벌어먹고 살았을 것이다. 아니, 코사인은 어머니에게 배운 회계를 어떻게 잘 써먹고 있기는 했다. 셈에 밝은 코사인을 선장은 퍽 아껴서 그에게 장부와 국자를 맡겼다. 뱃머리에 선 쌍둥이는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인이 먼저 말했다. “티니는 잘 있을까?” “어머니 아버지도.” 코사인이 말을 받았다. 그들이 떠나올 무렵 한 살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