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네 이웃의 식탁>

공간의 주인은 누구인가
‘식탁’은 처음부터 외면하기 어려운 상징이었다. 제목부터가 네 이웃의 ‘식탁’이었으니까. 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뒷마당에 놓여있는 식탁은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주택 설계자 가운데 누가 이런 걸 여기 둘 생각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경비가 남아서 들인 게 아니라는 짐작만은 할 수 있었다.” 라는 묘사를 통해, 작가는 이 식탁이 결코 가볍게 등장한 가구가 아님을 강조한다. 누군가의 의도 하에 계획적으로 놓아진 식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작품의 첫 페이지에서 ‘요진’의 눈을 빌려 무겁게 등장했던 것처럼, 식탁은 작품의 마지막 챕터에서도 또 다시 새로운 입주자의 시각을 빌려 등장한다. 여자는 어울리지 않게 뒷마당에 놓인 육중한 식탁을 눈으로 가늠하면서 이 주택에서 제일 오래갈 듯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네 가구 중 세 가구가 도망치듯 퇴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의 감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좀 미묘하다. 식탁은 사람들이 모여 그 위에 음식을 차리고 식기를 깔아 식사를 하기 전까지는 그저 나무를 깎고 조립해 만들어진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한 입주자는 식탁을 보며 ‘향후 몇 가구가 들고 나든지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만 같은, 이웃 간의 따뜻한 나눔과 건전한 섭생의 결정체’라고 느낀다. 그리고 자신을 다잡는다. 오래도록 여기에 버티고 서서 이 식탁을 보고 지낼 것이라고.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경기도 가상의 공간에 위치한 가상의 공공임대주택으로, 가파르게 떨어진 출생률을 극복하기 위해 세워진 실험공동주택이다. 그렇기에 입주자들은 반드시 이성애자 부부여야 하고, 나이는 42세 이하여야 하며, 이미 1명 이상의 자녀가 있는, 즉 ‘생산성’이 증명된 이들이어야 한다. 저렴한 가격에 신축 건물을 임대해주는 대신 입주자들은 몇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한다. 이를테면 ‘아이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실웃음이 나오는 자필 계약서가 있다. 당연하지만 모두 가상의 조건들이고, 가상의 계획이다. 이렇게 모욕적인 조건의 공공임대 사업이 정말 추진된다면 다들 반발하고 나설 것이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정책이 시행된다고 해도 분노할망정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불신과 체념은 비단 나만이 겪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 안에서 평생에 걸쳐 다양한 모욕을 체화해왔다. 개인 단위에서부터 가족 단위 내에서, 그리고 크게는 국가 단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행복하고 건강한 공동체’라고 하는 신화를 배우고, 또 동시에 배신당해왔다. <네 이웃의 식탁>은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복하게 아이를 낳고, 국가가 돕는 행복한 가정. 가족 구성원이 힘을 모아 서로를 돕는 건강한 가정.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가며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행복. 작품은 이 모든 것이 그저 허상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 공동체가 누구를 갈아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를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네 가구를 통해 보여준다.
독박육아로 지워져가는 스스로를 꾸역꾸역 메워가며 살고 있는 ‘강교원’과 ‘고여산’ 부부,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홍단희’와 ‘신재강’ 부부, 남편 대신 아내가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전은오’와 ‘서요진’ 부부, 그리고 프리랜서로서 작업과 육아를 동시에 견디고 있는 ‘조효내’와 ‘손상낙’ 부부는 저마다의 어려움을 해결해보자는 취지로 ‘공동육아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가정마다 얼마 정도의 돈을 갹출하여, 낮 동안 모여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자체 어린이집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당연하게도 새롭게 구성된 이 육아 공동체는 매끈하게 굴러가지만은 않는다. 이미 작업과 육아에 치일대로 치이고 있는 ‘조효내’는 자신의 동의도 없이 제멋대로 찬성한 남편 ‘손상낙’에게 크게 분노한다. 가계를 지탱하고 있는 ‘서요진’은 일주일에 한 번 일찍 일어나 대량의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전은오’는 ‘서요진’을 대신해 육아를 맡지만, ‘서요진’이 보기에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가 육아를 전담한 후에도 여전히 딸 ‘시율’의 양말이 어디에 있는지, ‘시율’의 기분이 어떠할지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동안 함께 출퇴근을 하게 된 ‘신재강’은 ‘서요진’에게 수상쩍은 희롱성 언사를 반복한다. 똑부러지고 공동체를 잘 맡아 이끌어 나가야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홍단희’는 매사에 비협조적인 ‘조효내’가 못마땅하다. ‘조효내’는 그녀대로, 육아와 작업으로 지치고 혼곤한 정신에 편하지 않은 이웃과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들이 모여 꾸리고 있는 ‘공동체’는 그 단어가 주는 어감과 같이 안락하고, 배려심이 넘치며, 양보가 줄을 설 것 같은 따스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 공동체에 감돌고 있는 것은 온기가 아닌,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한 긴장감에 가깝다.
‘서요진’은 마을의 근처에 있는 농가에서 끼쳐오는 분변 냄새를 맡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공기 중에 분산되는 강력한 입자가 최소한의 행복과 단란함 같은, 본질적으론 위선에 가까운 긍정적인 말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유기질의 냄새로 채웠다.”
유기질의 냄새, 살아있는 것들이 실제로 배출해내는 것들의 악취. 공동체라고 하는, 가족이라고 하는 위선적인 가치 아래 가려진 것이 어떤 식으로 곪아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동체는 실체가 없는 개념이지만, 그 공동체를 실제로 이루는 구성원들은 실재한다. 인물들이 배설하고 쌓고 삭히는 모든 것들은 이처럼 향수로도 가려지지 않는 유기질의 덩어리가 되어 끝내 그 공간을 차지한다. 그 괴리에서 오는 부하를 이기지 못하여 결국 이야기의 말미에서 ‘서요진’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과 남편 ‘전은오’를 버리고 도망치듯 달아난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뒷마당에 놓인 ‘식탁’은 ‘분뇨의 냄새’와는 정반대에 고요히 서 있는 가치다. 네 가구 중 세 가구가 도망치듯 퇴거하고, 새롭게 입주한 여자는 행복한 공동체를 꾸릴 각오가 되어 있다. 공동주택의 목적 역시 잘 기억하고 있으며, 둘째를 낳을 생각 역시 만만하다. 그녀는 커리어를 잃은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는 있지만 육아를 성취의 기준으로 삼고 딸아이와 유대감을 쌓아나가리라 다짐한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치는 ‘식탁’의 묘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녀는 뒷마당에 ‘식탁’이 놓여있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마땅히 여기 놓여있어야 한다고도 느낀다. 여자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식탁을 오랫동안 아침저녁으로 보고 지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가 서 있는 뒷마당에서는 축사에서 풍겨오는 분뇨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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