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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 예측불허한 삶을 위하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사계절 출판사


예측불허한 삶을 위하여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딸들>에 등장하는 유명한 명대사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 문장만큼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 문장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곱씹고 있노라면 위로가 된다. 내가 도통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어도, 단지 예측이 불가능할 뿐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앞이 깜깜해도 내 삶이 정물로 멈춰있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자신의 것으로 즐겁게 받아들이는 일은 일종의 권력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측불가능한 삶이란 일종의 허상과도 같다.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에는 그 어떤 체보다도 촘촘한 망이 겹겹이 걸쳐 있고, 모든 구성원은 그 망을 통과하여 걸어 나가게 되어 있다. 한 망을 통과할 수는 있지만, 다음 망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 어떤 망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걸러진 사람들의 삶은 손쉽게 간추려지고 미래는 예측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실격당했다고 말한다.


대학에 진학한 후, 나는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다. 모든 1학년들은 배역을 하나씩 맡아 연기를 하게 되어 있었고 나는 머리가 길고 마른 체구라는 이유로낙태를 앞둔 미혼모역을 맡게 되었다. 아마도 극본을 쓴 선배가 상상한 가련한 미혼모의 이미지는 그랬던 모양이다. 짧은 단편 영화였고 내가 맡은 역할은 말이 별로 없었다. 대개는 얌전히 앉아서 어항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때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악몽에서 깨어나거나 했다.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아기의 무덤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서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났다. 그렇게 좋은 영화는 아니었다.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관객들은 아마도 손쉽게 추려낸 몇 가지가련한 미혼모다운 기호들을 투영해 영화를 무리없이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맡은 캐릭터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본 위의 내 캐릭터에게는 성격이나 일상이랄 게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친구는 몇 명인지, 콜라는 좋아하는지. 그러니까 그녀는 오로지미혼모라는 기호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한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미혼모라는 손쉬운 기호로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객들의 생과 스크린 속의 미혼모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거나 또는 우러러볼 때,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에서 상대를 멀리 떨어트려 버릴 때 그의 생을 마음대로 요약하고 예측해버릴 수 있다. 그럴 때 그의 생은 맥락을 잃고 하나의 기호로 남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맥락을 만들어내어 몰입하고 연기를 하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각본가의 손에서부터 이미 그녀는미혼모라고 하는 기호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 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저자는 자신이 장애에노련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결국노련함이란 자신의 장애를 고도로 성찰한 끝에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둠으로써 생겨난다고 말한다. 모욕이 일상이 될 때, 자신을 지키려면 우리는 우리를연출하는 수밖에 없다. 상처를 입는 상황에서를 떨어트려 놓는 것이다.


9장에 걸쳐 진행되는변론에서, 저자는 개인적, 인간적 차원에서 사회적, 제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확장해나간다. 이와 같은 얼개는 이 책을 읽을 다수의일반독자들을 실격당한 자의 위치에 서도록 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에는 몇 겹이나 되는 거름망이 놓여있다. 이 거름망이 너무나도 많고, 또 촘촘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어느 지점에서든실격당한 자가 될 운명에 놓여 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실격당한 자를 배제할 때 그는 맥락을 잃고 기호가 되지만, 같은 위치에 우리를 놓고 사회의 거름망을 조망하게 될 때 우리는 상대의 개별성을 인지할 눈을 갖게 된다. 저자는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독자가 개인의 영역에서 법률과 사회 의무의 영역까지 사고를 뻗어 나가게끔 돕는다. 그리하여 끝내는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는 결말을 향해 우아하게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