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루엔 양, <진과 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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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는 손오공을 구해주지 않는다
<진과 대니>를 읽기 전, 나는 이미 ‘진’과 ‘대니’의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이 영상은 ‘American Born Chinese’라는 제목으로 아직도 게시되어 있다. 영상을 볼 당시에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의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진 루엔 양의 그래픽노블 <진과 대니>를 읽다가 다시 이 영상을 기억해낸 것이 신기할 정도로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먼저 해야 할 이야기는 그 유튜브 영상과 <진과 대니>는 아예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영상에 달려있던 비난의 댓글들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 긍정적인 감상은 거의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 영상이 스테레오 타입을 재생산하고 있다’, ‘왜 중국계 미국인들이 모두 잘생기고 키 큰 백인이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진은 그냥 매력이 없는 거야’, ‘그가 아시안이 아니었더라도 인기는 없었을걸’, ‘왜 아시안이 저렇게 소심하고 말을 더듬을 것으로 생각해?’……
나 역시 이 영상을 볼 당시에는 댓글들에 동의했다. 영상에는 문제가 많아 보였다. 소심하고, 쭈뼛거리며, 말을 더듬는 아시안 소년은 피부색 외의 부분에서도 매력이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키가 크고 잘생긴 백인 소년 ‘대니’로 변신하다니, 도대체 언제까지 아시안들이 백인의 우월한 외모를 동경한다는 이야기를 만들 셈일까? 지긋지긋했다. ‘대니’가 되자마자 온 학교의 여자애들이 시선을 보내는 연출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진과 대니>를 읽다가 이 영상을 떠올린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본질부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개는 같다. 동양인 소년 ‘진’이 나오고, 같은 반의 백인 여자애를 짝사랑하며, 그러다 나중에는 훤칠한 백인 소년 ‘대니’가 된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영상은 이 기본적인 줄거리를 가져다가 각색한 것이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잘려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잘려나간 까닭에, 영상은 제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아주 납작하고 스테레오 타입을 재생산하는 이야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저자는 <진과 대니>에서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병렬하여 엮어나간다. 첫 번째는 중국의 유명한 고전인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American born Chinese, ‘진’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친키’라고 하는 중국인 사촌을 둔 백인 소년 ‘대니’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불쑥 등장하거나, 어떤 물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면 독자들은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일종의 암시라고 받아들인다. 작가와 독자의 암묵적인 약속인 셈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 느닷없이 ‘손오공’이 등장했을 때부터 나는 서유기와 ‘진’의 이야기를 엮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천상계’에 속하고 싶은 ‘손오공’은 원숭이인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신을 신고 도술을 닦아도, 다른 이들에게 ‘손오공’은 그저 망나니 원숭이에 불과하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백인의 무리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중국계 미국인 소년 ‘진’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진’이 백인 소년 ‘대니’가 되기를 소망하는 과정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있다. ‘진’은 줄곧 백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껴왔다. 같은 반의 백인들은 그를 놀리거나, 비꼬거나, 동정할 뿐 친구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또 다른 동양인 학생 ‘웨이첸’이 전학을 왔을 때 ‘진’이 보여주는 반응은 사뭇 인상적이다. ‘진’은 갓 미국땅에 발을 디딘 것처럼 보이는 저 대만 소년 ‘웨이첸’과 자신이 같은 동양인으로 뭉뚱그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웨이첸’과 친밀하게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되는 순간 ‘동양인’에서 ‘동양인 무리’가 될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둘은 결국 친구가 되지만, 아마도 ‘진’에게나 ‘웨이첸’에게나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잠깐 다시 ‘손오공’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실제 서유기와 달리, <진과 대니>의 서유기에서는 ‘삼장 법사’가 돌산 아래에 깔린 ‘손오공’을 직접 구제해주지 않는다. 대신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던져줄 뿐이다. ‘손오공’은 결국 부풀렸던 몸을 줄이고 스스로 돌산 아래에서 빠져나와 신발을 벗어 던진다. 부풀리지 않은, 원숭이로 태어난 자신을 인정할 때에 그는 몸을 짓누르는 돌산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다.
왜 진 루엔 양의 ‘삼장법사’는 원작과 달리 ‘손오공’을 직접 구해주지 않았을까?
‘대니’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중국인 사촌 ‘친키’는 아주 우스운 캐릭터다. 중국의 전통 옷을 입고, 강렬한 악센트의 영어를 사용하고, ‘고양이 똥집 튀김 국수’를 먹고, 학교를 헤집고 다니며 ‘대니’를 망신주는 ‘친키’는 마치 그려낸 듯한 스테레오 타입의 중국인 캐릭터다. 심지어 이름이 친키(chinky)다. 이렇게 무성의하고 모욕적인 이름이라니!
‘대니’의 에피소드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해당 에피소드가 시트콤의 형식을 빌려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친키’가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대니’가 골치 아파할 때마다 컷의 하단에는 마치 시트콤에서 틀어주는 웃음소리처럼 “HAHAHA!”가 흘러간다. 컷 바깥의 관객들은 ‘친키’가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때마다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비웃는 듯한 관객들의 웃음소리는 ‘진’의 에피소드가 ‘대니’의 에피소드와 합쳐진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대니’의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내내 내게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백인의 외모를 하고 있는 ‘대니’에게 어떻게 중국인 사촌이 있을 수가 있는가? ‘대니’의 부모는 왜 목소리로만 존재하는가? 곧 이 의문은 다르게 바뀌었다. ‘진’이 ‘대니’였다면 도대체 ‘친키’는 누구란 말인가?
‘대니’는 일종의 가면이다. ‘아멜리아’라고 하는 같은 반의 백인 여자애를 좋아하게 되면서, ‘진’은 더욱 강렬하게 백인이 되기를 소망하기 시작한다. 백인 남자인 동급생에게 ‘아멜리아에게서 떨어져 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에 ‘진’의 내적 분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진’은 친구인 ‘웨이첸’에게 자신이 들은 끔찍한 말들을 고스란히 쏟아부은 다음에, 동양인인 자신을 부정하고, 백인 소년 ‘대니’가 되기로 한다. 미국 사회에서 동양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차별적 시선들을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피하고자 한 것이다.
즉 ‘친키’를 죽도록 증오하는 ‘대니’는 사실 ‘진’의 자기 모순적인 마음을 고스란히 옮긴 것이다. ‘대니’가 아무리 전학을 다니고, ‘친키’를 거부해도 ‘친키’는 끈질기게 ‘대니’를 따라붙는다. 무례하고 우스꽝스러운 사촌 ‘친키’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는 ‘대니’의 모습은 곧 ‘동양인’이기 때문에 ‘아멜리아’와 사귈 수 없게 된 ‘진’과 같다.
작중 친키가 사악한 표정을 하고, “대니 사촌, 친키 아메리카 사랑해! 친키 미국 위해 살아! 친키 매년 올 거야! 영원히!”하고 외치는 장면은 결국 ‘진’이 아무리 자신을 부정해도 끈질기게 따라붙어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회의 시선을 암시한다. ‘대니’가 등장하는 모든 컷에 그려진 시트콤 관객의 웃음소리 “HAHAHA!”는 ‘대니’ 역시 그들에게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관객의 웃음소리는 ‘진’이 ‘대니’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장면에서야 멎는다. ‘진’이 ‘진’으로 있기를 결정할 때, 그의 이야기는 시트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 독자들은 왜 진 루엔 양의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직접 구해주지 않는지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손오공’이 ‘직접’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진과 대니>는 ‘손오공’이라고 하는 중국 고전의 주인공을 끌어와 중국계 미국인인 ‘진’의 성장과 긴밀히 엮어 제시한다. 시트콤 속의 ‘대니’와 ‘친키’는 결국 ‘진’이 선택하지 않은 길이다. 백인 소년 ‘대니’를 꿈꾸던 ‘진’은 결국 시트콤 속의 납작한 인물로 남지는 않겠다고 선택한다. ‘진’의 삶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작가 본인이 걸어온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얼핏 보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세 가지의 이야기를 다양한 암시와 비유들을 활용해 단단하게 엮어, 끝내 한 소년의 성장 서사로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진과 대니>는 미국 사회의 소수자인 중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아에 혼란을 겪으며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모든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양인을 멸시하는 상징으로 종종 쓰이는 ‘원숭이’를 롤모델로 내세워, 갈등 끝에 자신을 긍정하고 나아가는 ‘진’의 이야기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삼장법사는 절대 돌산을 직접 치워주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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