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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2020년의 고요

2020-01-01 ()

 

2020년의 고요

 

몇천 원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고요는 뺨을 시트에 기대며 생각했다. 하다못해 머리를 기대라고 만들어 놓은 이 불룩한 부분마저 부실하게 느껴진다. 무궁화호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이렇게 무궁화호에 탄 채로 2020년이 오고 말았고.

고요는 2020년을 향해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추풍령 너머에 있는 고향땅에서 잡아 탄 것이다. 기차야 정해진 시간 정해진 만큼의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물건이니까 멋대로 잡아 탔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고요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어둠이 내린 밤중 여럿이 기차역에 서서 흰 입김을 화약처럼 내뿜으며 기다리고 서 있다가, 그들을 스쳐가려는 뿔을 낚아채 덜컹이는 가방을 끌며 동강난 허리에 올라탔으니 말이다. 기차는 반항하듯이 몇 차례 꿈틀거렸으나 곧 약속대로 순순해져서 사람들을 올려보냈고, 고요는 기차표를 꺼내 제 자리를 찾았다. 3호칸의 57번 창측 좌석. 4호칸에서 3호칸으로 짐을 질질 끌고 가면서 고요는 반쯤 곧 벌어질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 57번에 다리를 꼰 채 앉은 노인이 뭐 어쩌라는 눈으로 고요를 올려다 보았고, 고요는, 57번 제 자리인데요. 라고 말하는 대신 제 표를 눈앞에 내민 채 짐을 들썩였다. 노인은 몇 초간 더 버티는 듯 싶다가, “나 김천에서 내려.”하고 말했다. 김천이라면 추풍령을 넘어가기 전 있는 시골 동네였다. 가깝긴 했다. 2020년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마침내 손에 쥔 탓에 마음이 퍽 유해져 있던 고요는, 그냥 노인의 옆에 앉았다. 두툼한 패딩을 입은 노인이 조금 움직일 때마다 고요의 몸을 스쳤으므로, 고요는 너무 섣불리 패딩을 벗었노라고 잠깐 후회를 했다. 무궁화호의 문제야. 얼마 전 탔던 새마을호는 이렇게까지 좁진 않았는데. 고요는 복도쪽으로 몸을 돌리고 앉아 뺨을 시트에 부비며 생각했고 노인은 그런 고요를 계속 흘끔흘끔 보았다. 노인은 추풍령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간 뒤에야 내렸고 고요는 제가 구매한 창측 좌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마자 옆에 사람이 올라탔다.

검표원이 두리번거리며 3호칸에 들어섰으므로 고요는 속으로 간절히 생각했다. 옆자리 사람이 제발 무임승차한 것이면 좋겠다. 무임승차. 무임승차. 무임승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요와 마찬가지로 2020년행 기차를, 하필이면 3호칸 56번으로 구입한 사람은 고요와 비슷한 또래의 남성이었다. 안경을 썼고 계속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느라 분주했다. 살림이라도 차리려는 듯 했다. 글쎄, 새마을호라면 살림을 차릴만도 한데. 무궁화호에서? 고요는 잡지를 끌어안고 이번에는 창쪽으로 몸을 돌리고 앉아 뺨을 시트에 눌렀다. 그러다가, 대체 여기에 몇 명이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어쨌든 지금 나는 2020년으로 가는 기차를 탔으니까.

2019년은 지리하고 지루했다. 아니, 분명 반짝거리도록 즐거웠던 순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제일 싸구려 기차 주제에 무궁화호는 잘도 달렸다. 고요는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2019년의 잔재를 눈으로 쫓다가 몇 번이고 잃어버리길 반복했다. 해도 뜨지 않은 낮은 어둡다기보다는 칙칙했고 조용했으며 만물은 빛을 잃었다. 고요는 잿빛이 되어 필사적으로 뒤쪽을 향해 밀려나는 작년의 반짝임을 찾아보려 애썼으나 기차 밖의 사물은 곧 모든 형체를 잃어버렸다. 그렇다, 이럴 줄 모른 채로 2020년행 무궁화호를 탄 것이 아닌데.

고요는 추풍령 너머에 남겨져 있을 부모를 생각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2020년으로 들어올 것이지만 고요는 그들을 2019년에 남겨두고 왔으므로, 다시 만날 때까지는 아무래도 영영 2019년의 부모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9년의 마지막엔 참 다정하고 좋았던 부모의 잿빛 얼굴을 기차 밖으로 밀려나게 두지 않으려고 잠시 노력하다가, 고요는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떴더니 수원이었다. 앞 좌석에 앉았던 사람이 손을 포개고 잠든 고요를 쳐다보며 짐을 내리고 있어서 고요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옆 자리의 사람은 또 바뀌어 있었다. 이 사람은 또 어디서 저의 2019년을 놓고 이 기차를 탔는가? 어디서 내릴까? 고요는 수원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해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생각했다. 기차의 종착역까지는 30분도 남지 않았다.

나는 왜 이 기차를 타고 가고 있는가?

고요의 옆에 앉은 사람은 고요 또래의 여성이었으므로, 고요는 아까보다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남은 30분을 버틸 수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은 대체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그가 몸을 약간씩 움직일 때마다 그의 짐에서 반찬 냄새가 났다. , 고요도 비슷한 처지기는 했다. 엄마가 쥐어준 음식을 짐칸에 올려놓기는 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고요는 남의 집 반찬 냄새를 들이키며 한층 더 잿빛이 된 밖을 내다보았다. 무궁화호는 거침 없이 달리고 있었고 고요의 2020년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바깥은 색을 잃어가는 듯 했다.

고요도 딱히 반짝이고 찬란한 2020년을 기대한 건 아니어서, 별 유감은 없었다. 애초에 신년이라는 건 늘 겨울이고 겨울은 대체로 반짝이기 어렵다.

그래도 괜히 감정이 남아 발목을 잡는 것은 고요가 어쩔 수 없이 달력에 매인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열차는 종착역인,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빠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 주시고……

고요가 방송을 들으며 짐칸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2019년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는 2019년에서 고요가 빠트리고 간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너 달력을 놓고 갔어. 고요는 2019년의 엄마에게, 2020년에서 다시 신년 달력을 가지러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캐리어를 끌고 내려온 고요는 한숨을 쉬고 서울역 내부를 둘러보았다. 고요처럼 막 2020년에 도착한 사람들과 자신의 2020년으로 향하기 위해 기차를 타러 온 사람들이 그림처럼 북적이는 틈을 타, 노란 전광판이 반짝이며 길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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