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3(금)
해빙기의 발자국
날이 평년보다 따뜻하다는 그 예보가 정확히 무슨 의미였는지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 겨울이 지나면 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신도를 협박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사실 그도 정확히 알고 을렀던 말은 아니었다.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는 죽는 순간에도 스스로보다 높은 이상에 목숨을 바친 대가를 받을 날이 왔노라 믿었다. 미소짓는 시체 같은 건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온갖 것들이 해빙되어 그 잔해들이 천장과 바닥과 공기를 뒤덮으며 후두둑 터져나오던 날 소리는 공교롭게도 그 아래에 있었다. 소리는 도망을 치는 대신 눈꺼풀 위로 검은 얼룩이 고여 흘러내릴 때까지 얼굴을 위로 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도 모를 것들이 위에서, 밑에서, 또 바로 옆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사람들은 손으로 그 섬뜩하도록 차가운 것들을 직접 만져본 다음에야 이것이 갓 녹아내린 무언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답을 구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손은 차갑게, 차갑게, 스물스물 녹아내렸다.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냉기는 유기체 사이로 흘러들어 연약한 고리를 끊고 형체를 뭉그러트렸다. 그렇게 곧 모두 녹았다.
2월의 막바지였다. 소리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리에게는 3월이 지나 4월이 되어 마침내 바람에 찬기가 가실 때까지의 그 모든 날들이 겨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번 주는 평년보다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겠습니다, 라는 그 예보가 소리에게는 모두 무의미했다. 사람들이 불의의 습격을 당해 속수무책으로 해빙되는 동안 소리는 홀로 언 채 거기 있었다. 미끌거리는 표면에만 검은 얼룩이 부질없이 흘러내렸다.
신년의 거품이 맥없이 꺼지고 사람들이 12월과 별 다를 바 없노라 김샌 얼굴들로 도로를 활보해 마땅한 시기였으나 텅 빈 쇼윈도 사이를 거니는 것은 소리 뿐이었다. 이건 어느 부위로 만들어진 물웅덩이일까. 그는 장화를 새로 사려다가 파는 사람마저 녹아 없어졌으므로 곧 그만두었다. 바글거리는 것이 많았던 곳에는 묻어놓았던 것들도 많아 소리는 매일 새로운 웅덩이를 보았다. 그것들은 속시원하게 쏟아져 소리까지 부서트리는 대신, 스물스물 흘러나와 천천히 밑창을 흠뻑 적셨다. 모든 것이 녹아버린 해빙기에서 소리는 홀로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전에는 가보지 못한 곳을 함부로 걸어다녔다. 대사관을. 청와대를. 마추픽추를. 우유니 사막을. 알프스의 산맥 끄트머리를. 물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소리가 왜 녹지 않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소리 외의 사람들은 궁금해할 새도 없이 해빙의 순간을 맞이했으며 소리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소리는 추웠다. 해빙은 따뜻해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어디든 꽁꽁 얼어붙어있던 것들이 일제히 녹아 유유히 흐르며 갇혀있던 냉기를 퍼트렸기에 소리는 평년보다 추웠다. 자신을 뺀 모든 지구인이 전혀 모를 세계로, 2차원의 세계로, 편편하고 질척이는 액체의 세계로 녹아들어 탈출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어쩌면 이 3차원의 행성과 함께 여기 영영 여기에, 누구보다 꼿꼿하게 굳은 채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영원히 추워하면서. 녹아버렸어야 하는 순간에 녹지 못한 채 영원히 추워하면서.
소리는 매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이 범람한 엉망진창의 지구를 걸어다녔다. 소리가 걸을 때마다 거대한 푸른 색의 젤리 쉐이크는 발자국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무엇이라 할 것도 없는 덩어리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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