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2 (목)
하얀 주름 이불 이야기
오늘은 하얀 주름 이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내가 어렸을 때, 엄마의 방에는 카탈로그에 나올 법한 크고 아름다운 침대가 있었어. 매트리스는 어린 내가 대여섯 번은 굴러도 괜찮을 만큼 널찍했고 높은 헤드는 몸을 기댈 때마다 다정하게 삐걱대는 소리를 냈어. 검고 튼튼한 다리 아래에서 부드러운 먼지 냄새가 풍겼지. 새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정말 근사한 침대였어. 지금 생각하니 그건 엄마의 신혼 살림이었을까?
그래도 가장 멋진 부분은 이불이었지.
희고 부드러운 주름이 아마 수천 개는 되었을 거야. 피부에 닿는 촉감은 서늘하고 촉촉했고, 한쪽 끝을 잡고 들어올리면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렸지. 그런데도 무게감만큼은 확실해서, 이불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그 위로 뛰어들면 난 꼭 질식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 하얗고 차갑고 부드럽고 무거운 것 속으로 한없이 잠겨들고 싶었어. 그러기엔 너무 얕았기 때문에 나는 대신 거기 파묻혀 책을 읽었어. 주름을 한 움큼 쥔 다음, 목 둘레로 둘러 몸을 감싼 다음 풀썩 주저앉으면, 짠. 거울에 비친 나는 천천히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 속에서 고개를 내민 사탕처럼 보였지. 책에 나오는 어린 여왕의 드레스처럼도 보였고.
내가 그 이불에 파묻혀 읽었던 건 내 책이 아니었어. 그런 특별한 이불 속에서는 특별한 것을 읽어야 하잖아. 십칠년 전 쯤에는 엄마에게도 엄마만의 책장이 있었는데, 어쩌다 나는 엄마를 책과는 도무지 붙여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까? 결혼하기 전의 엄마에게는 너무나 아낀 나머지 신혼 살림에도 챙겨다니던 책장이 있었는데. 책임은 나에게도 있을 거야. 나는 거기서 나보다 더 나이를 먹은 책들을 읽었어. 노랗게 바랜 종이에서는 침대 밑에서 나는 것처럼 부드럽고 쿰쿰한 먼지 냄새가 났지. 나는 거기에 코를 박고 「나의 오렌지나무」와 「데보라」, 「갈매기의 꿈」 같은 책들을 읽었어. 내가 쓰는 모든 단어는 거기서 발원했다고 보아도 좋아. 정말이야. 나는 흰 이불 속을 뒹굴며 세상을 먼지 냄새가 나는 단어로 오리는 법을 배웠어.
어떤 책에서는 그때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잔뜩 나왔지. 여주인공이 투명하고 납작한 통에서 초록빛이 돌고 쌉쌀한 맛이 나는 피스타치오를 꺼내어 쓸쓸히 씹을 때 나는 주름 속에 파묻혀서, 뽀빠이 속의 별사탕을 아작아작 씹으며 피스타치오란 건 이런 맛일까 하고 상상했어. 그때의 내게는 책과 현실 사이에 거리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제제가 밍기뉴에 올라타 몸을 흔들고 말을 걸 때 나는 아파트 뒤란의 단풍나무를 기어올라 똑같이 몸을 흔들곤 했어.
누구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 용하지?
아, 이제 나는 피스타치오가 무슨 맛인지 잘 알아. 뽀빠이 속 별사탕 맛은 당연히 아니고, 베스킨라빈스의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맛도 물론 아니지. 글쎄, 내가 여주인공이었다면 쓸쓸히 한 알씩 씹어 삼키는 대신 앉은 자리에서 한 봉지를 우습게 털어넣었겠다는 생각은 들어. 환상이 깨져 아쉽냐고? 그렇지는 않아.
흰 주름 이불이 언제 사라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네. 가끔 어떤 물건은 뚜렷하게 족적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순간에 존재했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하면서 나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들어. 자리에 앉아 기억을 돌이켜보았는데 언제 검은 다리의 침대가 사라지고 라텍스 매트리스가 들어왔는지, 언제 어린 여왕의 흰 드레스 대신 두터운 자줏빛 꽃무늬 극세사 이불이 들어왔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아. 12살 때에 이미 없었던 것도 같았다가, 당장 어제도 보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난 몰랐는데, 엄마는 차를 좋아했어. 책을 좋아했던 것처럼. 난 무심코 내 찻잔을 자랑했을 뿐인데 그때 그 사실을 알게 됐지. 가장 좋아하는 차는 국화차지만 찻잎을 우려마시는 한국식 다구도 엄마의 찬장에 끼어 있었지. 더는 쓰지 않아 먼지 더께가 찐득하게 앉은 것. 얼마 전 집에 내려갔더니, 그 다구는 아주 귀여운 선인장 화분이 되어 있더라고. 말끔하게 씻긴 표면이 반짝거렸고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워서 그만 웃어버렸지.
엄마와 내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데, 젊었을 때의 엄마가 나처럼 책을 읽고 차를 마셨다고 생각하면 나는 또 그만 흰 이불을 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어. 그게 정말 사라졌을까? 어제? 아니면 12년 전에 이미? 어쩌면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얀 주름 이불 이야기를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딴 길로 샌 것 같아?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정말 한 덩어리의 것이야. 의심할 여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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