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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3: 오래 전의 불리

2020-01-13(월)

 

오래 전의 불리

 

그 애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 가고, 나와 그 애의 연락은 그 애가 졸업식에 대뜸 찔러 넣고 간 3장이나 되는 기나긴 편지가 마지막이었지만,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그 애를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은 뜻은 아니다.

어쨌든 그 애의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날 이미 잊었다 해도 상관 안 해.

미안해.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미리보기로 볼 수 있는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3년 전 그 애의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그때도 나는 선택을 했다. 그 애가 경보하다시피 나를 스쳐가며 내 품에 퍽, 찔러 넣었던 3장의, 말하자면 이별 편지를 나는 찢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읽었냐고? 읽었다. 아, 내용이 기억이 났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그 애와 절교가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가까운 말은, “넌 날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친구로 생각하면 이럴 수 없어.”였고 그럴 때마다 그 애는 코웃음을 치며, “내가 뭘 어쨌는데?”라고 말했다. 글쎼, 그 애와 내가 하는 짓은 정말 친구같지 않았다. 나는 그 애 덕분에 얼마 있지도 않은 모든 친구와 절교를 했고 외톨이가 된 내 앞에서 그 애는 의기양양하게 제 반 친구와 팔짱을 끼고 으스대며 보란듯이 걸어다녔다. 나의 다른 친구들은 늘 “걔는 널 너무 함부로 대해.”라고 말했고 내가 그 말을 전하기라도 하면 그 애는 웃으며 말했다. “걔네랑 나 중에 누구랑 더 친해 너?”

내게 친구가 생기면 그 애와 싸워야 했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고, 싸우다 보면 나나 친구 둘 중 하나는 나가떨어지고, 나는 다시 그 애에게 돌아가고…… 그 애의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머리를 싸맸다. 독특한 것. 받으면 기뻐할 만한 것. 남들과는 다른 선물. 돈만으로는 안 되고,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들. 정성이 들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게 차마 상처내지는 못할, 그런 선물들. 나는 생전 만들어본 적도 없는 수제 초콜릿을 만들었으며 손편지를 3장씩 썼다. 내가 그 애 대신 다른 친구의 집에 놀러 간 날, 나는 장문의 욕설 문자-날 무척 잘 안 나머지 내 가족들도 다 알았던 그 애는 가족들의 욕도 한 명 한 명 꼼꼼히 적어보냈다-를 받고 무척 마음이 편해져서 절교를 선언했다.

그 다음 또 다시 지나친 드라마들, 드라마들. 나는 너덜너덜해졌다. 나중에는 어찌됐든 좋으니 제발 절교만 해달라고 빌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이기적이고, 못됐고, 너의 시험을 사보타주하려고 일부러 지금 절교 선언을 했고, 그래 다 맞아. 그러니 제발 절교해 줘. 날 놓아줘. 그 애는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고, “가 봐.”라고 했다.

그리고 졸업식날 받은 이별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네 말이 맞았어. 난 널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그런 편지를 받고 내가 보일 반응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찢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 애는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렇게 내게는 고등학교 친구가 단 두 명 남았다.

 

어딜 가도 또 한 명을 낚아 잘 살 것 같았는데. 그 애의 앞날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한 적이 없다.

좋은 뜻은 아니다.

미련하게도 난 10년 간 그 애가 어쨌든 날 기억하고 있긴 했다는 사실에 약간 쾌감을 느꼈다. 그 애가 나에게 남긴 것만큼의 지분 정도는, 나도 그 애 몫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난 선택을 해야 했다.

미리보기를 누르기 전이라면 아직 멈출 수 있어. 10년 간 튼튼히 쌓아올린 내가 말했다. 그 아래 눌려 있던, 10년 전의 내가 말했다. 읽어. 읽어도 어차피 저 애는 몰라. 즉시 지금의 내가 반박했다. 쟤는 알 바 아냐. 보는 순간 난 지는 거야.

그러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왜 나는 오래 전 이긴 뒤 영영 끝내버린 줄 알았던 그 애와의 힘겨루기를, 10년이나 지금에 와서, 그것도 혼자서 또 하고 있단 말인가?

 

의미부여를 지나치게 하는 것 또한 지는 것과 뭐가 달라?하고 항변한 과거의 내가 마침내 이겼다. 나는 지난 10년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으며 메시지를 클릭했다. 대체 나는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 애가 내게 비참하게 매달리기를? 아니. 그 애가 심각한 일을 겪었기를? 아니. 그 애가 결혼 소식이라도 전하면 어떡할래? 그럼… 웃기는 년이지. 그걸 왜 나한테 보내?

내 모든 예상은 빗나갔다.

날 이미 잊었다 해도 상관 안 해. 미안해.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그 애의 메시지는 그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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